에이섹슈얼과 에이로맨틱 가시화를 위한 정보 아카이브 -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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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이로맨틱과 에이섹슈얼(무성애자)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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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로맨틱은 어떤 젠더에도 연정적 끌림을 경험하지 않는 성향을 뜻하는 말이다. 에이섹슈얼은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향을 가리킨다. 에이로맨틱과 에이섹슈얼은 다른 성적 지향보다도 가시화되지 않은 소수자성을 가졌다.
- ‘무성애’는 무성애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다양한 담론이 이어지고 있다. 학문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고, 사회학이나 성의학 같이 성적 정체성과 깊이 연관이 있는 학계에서 무성애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1940년대 후반 미국의 동물학자이자 성의학자인 알프레드 킨제이가 자신의 책에서 간접적으로 오늘날의 개념과 비슷한 ‘무성애’를 언급한 후부터, 여러 학자들에 의해 상당히 축척된 연구들이 있다. 2000년대부터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각국에서 무성애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야기하는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었다.
-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무성애의 정의는 “타인에게 성적끌림을 느끼지 않는 정체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인 “성적끌림”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성적으로 끌리는 대상과 성적으로 접촉하거나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욕구, 혹은 이러한 욕구를 끌어내는 정서적인 반응”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와 다른 정의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 무성애자는 크게 성적끌림을 느끼는 정도와 로맨틱지향성의 양상에 따라서 분류할 수 있으며, 성적끌림을 느끼는 양상에 따라서 여러 가지 유형이 존재할 수 있다. 성적끌림을 느끼는 정도에 따른 분류로는 무성애자, 회색무성애자로 나타날 수 있다.
- 회색무성애자는 무성애와 유성애 사이의 성지향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특정한 상황에서만 성적끌림을 느끼는 사람이다.다음으로 로맨틱지향성에 따른 분류이다. 무성애자는 성적끌림을 느끼지 않는 대신, 로맨틱끌림을 느낄 수 있다.
- 흔히들 무성애자가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는데, 그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여기서 정의하는 로맨틱끌림이란 “끌린 상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로 연결되는 정서적 반응”이다.
- 로맨틱지향성에 따른 분류로는 이성로맨틱 무성애자, 동성로맨틱 무성애자, 양성로맨틱 무성애자, 범성로맨틱 유성애자가 있다. 무성애를 가시화하는 데에 선두자로 나섰던 앤서니 보개트는 무성애가 “특정한 타인이나 사물에게 자신의 성적욕망을 향하게 하지 않는 정체성”이라고도 정의했다. 로맨틱과 섹슈얼은 별개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동일시되어 무성애자에게 ‘언짢은’ 시선과 차별, 혐오발화가 이어진다.
- 결론적으로 무성애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무성애자는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정체화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무성애라는 개념은 정체화에 도움을 주는 하나의 ‘라벨’인 것이다.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널리 사용되는 정의인 ‘타인에게 성적끌림이 없는 정체성’은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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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에이로맨틱과 에이섹슈얼(무성애자)의 차별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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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무성애와 성적관계 그리고 연애의 편견이다. 이는 무성애에 대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무성애자는 성적끌림이 없는데도 타인과의 성적관계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무성애자는 유성애자인 파트너를 성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적관계가 파트너 간에 불러일으키는 로맨틱한 분위기에 주목해서, 성적관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아이를 낳기 위해서, 또는 자신이나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정상’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타인과 성적관계를 가진다. 또한 타인에게 성적끌림을 느끼지 않지만 자발적으로 타인과 성적관계를 가지는 무성애자도 있다. 성적끌림과, 성적관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쾌감 혹은 육체적인 친밀감은 별개로고 인식하는 경우들이 대게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정체화하는 데에 성적관계의 유무는 정확한 기준이 되기 어렵다.
- 둘째로는 무성애는 금욕주의가 아니냐는 편견의 말들을 듣는다. 무성애는 개인적인 가치관이나 종교적 이유로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금욕주의와는 다르다. 독신주의나 금욕주의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거나 중단할 수 있는 실천이자 가치관이지만, 무성애는 성지향성이며 선택에 의해 바뀌기 쉽지 않은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이 대칭되거나 충돌하는 관계는 아니다. 무성애자 중에서도 독신주의자나 금욕주의자가 있으며 그렇지 않은 무성애자도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 다양한 이유로 자위행위를 하거나 타인과의 성적관계에 참여하는 무성애자도 있다. 무성애는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취향’이 아니다.
- 셋째로는 무성애는 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성애는 전세계적으로 정신질환 진단에 쓰이는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무성애를 질환으로 규정해왔다. 구체적으로는 ‘저활동성성욕장애’로 말이다. 이 때문에 무성애자가 무성애자로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이 문제를 느낀다는 이유로 장애의 진단 기준이 되었다. 저활동성성욕장애와 무성애의 차이로, 무성애자의 성적끌림의 부재는 많은 경우 일생 동안 지속되는 ‘지속성’과 무성애자가 이로 인해 스스로가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덧붙여 무성애 정체성은 한편으로 정신질환으로, 트라우마로 규정될 수 있다. 하지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원인이 있다하더라도 제 3자가 지레짐작으로 당사자에게 단정지어버리는 것은 혐오발언이다. 설령 원인이 있다하더라도 현재의 ‘나’는 무성애자라고 교정당하고 싶지 않아서 무성애자라고 정체화한 것이다. 또한 무성애가 ‘무엇 때문이다’라고 할 때, 이것은 정체성이 아니고 비본질적이며 일시적인 특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교정할 수 있다는 전제인 것이다. 이런 식의 단정적 발언은 무성애에 영향을 주는 외적 요인을 논의하려는 시도를 억제할 수 있고, 성지향성을 선천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님에도 이러한 관점이 공고해질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 넷째로는 무성애자가 성소수자인지 아닌지의 갈리는 부분이다. 실제로 성소수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무성애 혹은 무성애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무성애자가 아닌 어떤 성소수자는 무성애자가 성소수자라는 점을 인정한다. 반면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거나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도 한다. 이들은 무성애자가 성적으로 억압되었다든가, 성적으로 미숙하다든가, 장애라든가, 그런 정체성이 진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등의 말을 하기도 한다. 과연 무성애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소수자가 아닐까? 활발한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